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구려-당 전쟁 (문단 편집) == 3차 전쟁 == 2차 전쟁 이후에 대막리지로써 고구려의 실권을 쥐고 있던 [[연개소문]]이 사망하고, 뒤를 이어 장남인 [[연남생]]이 태대막리지의 지위에 올랐다. [[연개소문]]은 유능했으며 [[당나라군|당나라 군대]]를 상대로 수차례 승리하였으나, 연개소문의 뒤를 이은 연남생의 두 동생 [[연남건]], [[연남산]]이 형의 지위를 탐하여 서로 간에 권력 투쟁을 벌이다가 급기야 무력 행사로 사태가 확대되면서 고구려 안에서 [[내전]]이 벌어진다. 연개소문의 장남인 태대막리지 연남생은 자신의 지위를 탐내던 두 아우 [[연남건]], [[연남산]]에 쫓겨 [[평양성]]을 나와 [[국내성]]을 근거지로 삼아 대항하다가 힘이 부치자 '''급기야 당에게 국내성을 비롯한 성 6개와 10만호에 달하는 무리를 거느리고 투항하여 군사 지원을 요청하였다.''' 비슷한 시기(666년 12월)에 3형제의 삼촌이자 연개소문의 동생인 [[연정토]]는 고구려 남부 12개 성과 함께 [[신라]]에 투항했다. 연개소문 사후 고구려는 이미 제대로 싸워보기도 전에 내부에서부터 사분 오열되고 있었던 것이다. [[노태돈]]은 [[속일본기]]의 [[http://db.history.go.kr/id/jm_002r_0330_0070|한 기록]]을 보아 이 당시 고구려가 일본에 군사지원을 요청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보기도 했다. 고구려는 일본서기에 의하면 666년 정월, 10월, 그리고 말 그대로 멸망하기 일보직전인 668년 7월에도 일본에 사신을 보냈는데 당시 고구려에는 일본과 연줄이 있는 옛 백제의 왕자 [[부여풍]]이 망명해 있었고, 일본은 663년 백제부흥군의 [[백강 전투]]에 지원군을 실제로 보낸 전례도 있으므로 지푸라기라도 잡으려 했다는 것이다. 다만 일본은 백제부흥군이 몰락한 이후 신라에 우호적인 태도로 전환해 한반도에 개입을 그만두고 혹시 모를 당나라의 공격에 대비해 성을 쌓고 방어태세를 갖추는 중이었으므로 고구려를 돕지는 않았다. [[고종(당)|당고종]]은 고구려가 내부에서 혼란에 빠진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666년 12월 [[이세적]]과 [[글필하력]], [[설인귀]] 등을 총관 등에 임명하고 군사를 내주어 고구려를 침공했다. 이들은 당 태종과 함께 오랫동안 전쟁을 수행한 명장들이었고, 고구려와 오랜 전쟁을 겪어 경험이 풍부한 장수들이었다. 또한 측천무후와의 권력 투쟁에서 살아남은 몇 안되는 공신들이기도 했다. 이 때 남생의 배신으로 고구려 내부의 정보와 기밀이 당으로 새어나가고 연남생이 바친 고구려 영토가 고스란히 당나라의 보급 기지가 되면서 전황은 [[당나라군|당군]]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여태껏 당군은 고구려를 칠 때 항상 보급 문제로 골치가 아팠는데 그게 연남생의 항복으로 저절로 해결된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